엘 알라메인 전투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1942년 북아프리카에서 전차 600대를 앞세운 독일 아프리카 군단이 사하라 사막을 지나 이집트로 향합니다. 이에 맞선 영국군 전차는 1,200대였습니다. 엘 알라메인 전투의 지휘관은 독일 쪽이 롬멜이고, 연합군 쪽은 몽고메리입니다.
위의 지도에서 보시는 것처럼 독일은 리비아에서 이집트를 통과하면 석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1942년 1월 2차 세계대전 때 북아프리카의 지배권을 두고 독일군과 연합군이 전투를 벌인 것이 엘 알라메인 전투입니다. 독일군은 북아프리카 진로를 이용해 이집트를 통과하면 석유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아프리카 경로로 석유를 향해 진격한 것입니다. 연합군은 이를 방어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전투는 1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독일에 맞선 영국군 8군단이 막강한 전력으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영국의 상대는 당대 최고의 지장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 원수였습니다.
위의 빨간색 원이 롬멜 원수입니다. 1941년 내내 롬멜의 기습 공격으로 영국군은 상당히 고전했습니다. 하지만 롬멜의 전력이 약화한 1941년 12월 연합군이 반격에 나섰습니다. 독일군은 6주 동안 서쪽으로 800km나 후퇴했습니다.
1941년 1월 말 롬멜의 전차는 총 228대로 팬저 3, 4호가 139대였고 나머지 이탈리아 전차는 성능이 떨어졌습니다. 반면 영국군의 전력은 발렌타인 전차가 160대, 크루세이더 전차가 230대 이상이었습니다.
연합군의 전력이 크게 앞섰지만, 롬멜은 굴하지 않고 승리를 다짐했습니다.
아래는 롬멜의 회고록입니다.
“영국군이 전력을 다해 공격해 올 게 뻔하다. 방어가 허술한 진영 남부가 지속해서 공격받으면 보급에 차질이 생긴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순 없다.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
롬멜은 위의 그림처럼 돌아서 영국군 측면을 공격하는 수법으로 전투를 하였습니다. 팬저 3호 J형이 선두에 배치되었습니다.
위의 사진이 팬저 3호 J형입니다. 대전차용으로 개발한 이 전차는 전면 장갑이 50mm나 됐습니다. 이 전차의 최대 장점은 50mm 주포였는데 최대 650m까지 철갑탄 포격이 가능했습니다. 당시 영국군 8군단에 이만한 무기는 없었습니다.
영국군 전차는 포신이 짧아서 관통력이 약했습니다. 독일군 전차는 장거리 포격이 가능했습니다. 전차 성능 면에서는 독일이 영국보다 앞섰습니다.
위의 전차는 영국군의 주력전차인 크루세이더입니다. 사막에서 시속 24km까지 내어 속도 면에선 최고였습니다. 대신 장갑이 32mm에 불과해 대전차 포격에 취약했습니다. 2파운드 주포도 팬저 앞에선 무력했습니다.
전력은 밀리지만 승산이 있다고 여긴 롬멜은 1942년 1월 21일 공격에 나섰습니다.
위의 전차는 미군의 그랜트 전차입니다. 저 전차도 엘 알라메인 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랜트 전차는 전면 장갑이 51mm에 달해 여섯 승무원도 그만큼 안전했습니다. 무엇보다 독특한 점은 강력한 측면 전차포였는데 독일군의 측면 공격에 대응할 수단이 됐습니다.
5달 동안 롬멜은 영국군을 밀어붙였습니다. 항구도시 토브룩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거점을 탈환했고 6월 말 무렵엔 이집트 국경을 넘어 엘 알라메인에 접근 중이었습니다. 수에즈 운하까지 남은 거리는 불과 300km 승리가 눈에 보였습니다.
하지만 방어 태세를 갖춘 영국군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60km에 걸쳐 전차를 배치하여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1차 엘 알라메인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집트의 엘 알라메인은 북아프리카 연안의 작은 도시입니다. 그 작은 도시에서 2차 세계대전 때 엘 알라메인 전투가 두 번 치러졌습니다.
1942년 6월 5달째 동진을 계속한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은 영국이 주둔한 이집트를 지나 중동의 유전을 장악할 계획이었습니다. 롬멜은 엘 알라메인까지 진격했고 수에즈 운하까지 300km 남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오랜 전투로 전력이 부족했습니다.
엘 알라메인에 도착한 롬멜은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보병 2,000명, 야포와 대전차포 수십 대, 팬저 전차 55대가 전부였습니다. 다른 지휘관이라면 방어나 후퇴를 했겠지만, 롬멜은 1942년 7월 1일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1차 엘 알라메인 전투입니다.
아래는 롬멜의 회고록입니다.
“엘 알라메인에 진격한 후 포격만 주고받다가 소강상태에 빠지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엘 알라메인의 방어선을 뚫고 재정비할 틈조차 적에게 줘선 안 된다.”
26일간 전투가 지속됐지만, 롬멜은 방어선을 뚫지 못했습니다. 1차 엘 알라메인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롬멜은 보급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급 중 물 문제가 가장 심각했습니다. 늘 물이 부족했습니다. 1,500km나 떨어진 곳에서 물을 퍼 날랐습니다. 근데 연합군의 포격으로 독일 보급품의 80%는 전방부대가 갖지 못했습니다.
반면 8월에 영국군은 보급품 50만 톤을 받았습니다. 버나드 몽고메리 중장도 새 사령관으로 왔습니다. 적의 보급이 늘기 전에 손써야 했습니다. 8월 30일 롬멜은 최후의 공격에 나섰습니다. 영국군을 기습해서 몰아낼 계획이었습니다.
롬멜은 신형 전차와 기동 전술을 이용해 연료가 동나기 전에 공격을 서둘렀습니다. 하지만 몽고메리가 한발 앞서 전차 400대와 대전차포 200문을 배치했습니다.
아래는 몽고메리의 회고록입니다.
“알람 엘 할파 능선은 전략 요충지였다. 교전을 서두르지 않고 이 능선에서 롬멜을 물리치기로 했다.”
롬멜은 기습작전에 실패하고 9월 2일 전세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롬멜은 팬저 50대를 잃고 퇴각을 명했습니다. 군수 물자가 거의 바닥난 롬멜은 공격 대신 방어에 집중했습니다.
북아프리카 공방은 엘 알라메인에서 기동전이 줄고 소강상태에 빠졌습니다. 롬멜은 전선을 옮겼습니다. 엘 알라메인 모스크와 카타라 저지를 잇는 구간인데 총 거리가 60km였습니다. 영국군을 막는데 유리한 지형이었습니다. 독일 진영 좌측은 지중해가 버티고 있었고 진영 우측은 카타라 저지가 있었습니다. 면적 2,600km²의 모래땅인 카타라 저지는 전차 이동이 불가능했습니다.
롬멜은 방어 태세를 갖추며 강력한 대전차 지뢰를 전선 곳곳에 설치했습니다. ‘악마의 정원’이라는 대규모 지뢰밭을 만들었습니다.
10월 23일 저녁 몽고메리는 대대적인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밤인데 낮처럼 모든 것이 환히 보일 정도로 포격을 계속했습니다. 이것이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입니다. 몽고메리는 세 갈래로 전차 700대를 보냈습니다. 독일군 전력을 분산, 견제하면서 주력 부대로 북부를 칠 계획이었습니다. 해안도로나 키드니 능선을 장악하기 위해서입니다.
독일군 병력과 비교해 연합군 병력이 5~6배 많았습니다. 키드니 능선의 독일군은 열세였습니다. 보병이 600명, 대전차포가 18문, 전차가 47대였습니다. 영국전력은 4배였고, 전차 150대로 후방 지원까지 했습니다.
1942년 10월 23일 연합군 사령관 몽고메리는 독일군을 섬멸하고자 세 갈래로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은 굳게 버텼고 공격은 실패했습니다. 병력 차를 고려하면 처참한 결과였습니다.
2차 엘 알라메인 전투가 사흘째 접어들었을 때 양측 피해는 이미 상당했습니다. 롬멜의 독일군은 그 후 닷새를 더 버텼습니다. 하지만 11월 1일 남은 전차는 500대 중 35대뿐이었습니다.
승리를 코앞에 둔 몽고메리는 ‘슈퍼 차지’작전을 개시했습니다. 독일군 섬멸을 위한 총공격이었습니다. 이틀을 더 버텼지만, 독일군이 남은 전차는 12대뿐이었습니다. 결국 롬멜은 퇴각했고 엘 알라메인 전투는 끝났습니다.
롬멜측은 사망자 5,000명, 부상자 8,000명, 포로만 35,000명에 달했습니다. 몽고메리 측은 사망자 2,300명, 실종자 2,200명 이상, 부상자 8,500명에 전차 500대를 잃었습니다.
이상 엘 알라메인 전투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전쟁은 미친 짓이지요. 미리미리 대비를 잘하여 전쟁이 안 나도록 노력합시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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