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전쟁 원인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걸프전쟁은 1차 걸프전쟁입니다. 1차 걸프전쟁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연합군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시기는 1990년~1991년입니다. 걸프전쟁 원인은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요. 여기서는 전차대전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말하는 걸프전쟁 원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위의 그림은 걸프전쟁 당시 다국적군이 서쪽 사막으로 돌아서 쿠웨이트에 진입한 것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1991년 2월 24일 미국은 사우디 사막을 건너 이라크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다국적군에 소속된 이들의 임무는 한 가지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이란과 전쟁이 끝나자 난감했습니다. 일단 규모가 커진 군대를 놀리는 상황이었고 전쟁 탓에 이라크 경제가 무너진 것도 문제였습니다. 후세인은 돈이 궁했고 손쉽게 해결하고자 옆집을 털기로 했습니다. 옆집은 바로 쿠웨이트입니다.
이라크군은 36시간 만에 석유 부국 쿠웨이트를 장악했습니다. 후세인은 유엔의 철군 요구를 무시했습니다.
결국 미국을 필두로 유엔 다국적군 62만 명이 파병되었습니다.
벅찬 상황인 건 후세인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볼 때 미국은 인명 피해에 연연하는 나라였습니다. 이란전 때와 비슷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양군이 공방을 주고받다가 미국이 항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후세인의 전략은 미군 사상자를 극대화하는 거였습니다. 자군 피해는 큰 신경을 안 썼습니다. 그는 66개 사단 중 51개 사단으로 방어 태세를 갖췄습니다. 엄폐 전술이었습니다.
후세인은 16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군단을 사우디 국경에 배치해 적습에 대비했습니다. 정예부대인 공화국 수비대 8개 사단은 후방에 배치했습니다. 규모는 전차 천 대 병사 12만 명입니다. 다국적군 사상자를 늘릴 대규모 반격용입니다.
후세인은 쿠웨이트에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국적군의 전략은 후세인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다국적군이 서쪽으로 갈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서쪽 지역은 길도 없는 사막이라 그 길을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후세인은 생각했습니다. 이라크군조차 그 서쪽 사막에 가면 길을 잃기 쉽상 입니다. 지형은 단조롭지 길도 없지 길을 잃기 딱 좋습니다. 이라크군이 한 가지 몰랐던 것은 GPS라는 신기술이 개발됐다는 점 입니다.
1차 걸프전쟁은 GPS가 도입된 첫 전쟁입니다. GPS 덕분에 다국적군은 사막을 건너 주요 방어선을 무시한 채 무방비 상태인 적 측면을 노릴 수 있었습니다.
미군은 험비에 고출력 확성기를 달아서 심리전으로 항복 권고를 방송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최전방에 있던 이라크군 정찰부대는 미군에 순순히 포로로 잡히기도 했습니다. 심리전 부대는 이라크로 진입할 때 ‘발퀴레의 기해’이라는 음악을 틀기도 했습니다.
미군은 서쪽 사막으로 대규모 전차부대를 보냅니다. 전차 기술의 차이로 인해 이라크군은 수천 명이 죽을 때 미군은 몇 명 정도 죽는 전력 차를 냅니다.
이상 걸프전쟁 원인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현대라 하더라도 결국 자기 나라를 지키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합니다. UN만 믿다가는 내 모든 것을 힘 있는 자에게 뺏기기 딱 좋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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