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대제 에 대해 알아봅시다



표트르 대제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표트르 1입니다. 1696년 새롭게 권좌에 오른 차르(러시아 황제)는 이반 4세가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고 정체되어 있던 러시아를 근대화하는 데 집중합니다. 그의 이름은 표트르 대제(1672~1725)입니다.

 



위의 그림이 표트르 대제 모습입니다.

표트르 대제는 무척 독특한 인물입니다. 2m 가까운 거구만큼이나 배포도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관습이나 전통을 개의치 않았고 항상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언제나 활력이 넘쳐흘렀습니다. 열 명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표트르는 어린 시절 모스크바에서 지내는 동안 외국 인촌에 거주하는 예술가들과 군인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전술과 기술을 익혔습니다. 표트르는 유럽의 기술에 매료됐습니다. 또한 유럽에 비해 러시아의 후진성과 약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고 했습니다.

표트르는 신분을 숨긴 채 유럽으로 가 당시 최고의 조선술을 지닌 네덜란드에서 배 만드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또한 영국 해군으로부터는 항해술을 익혔고, 여러 유럽 제국들이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하며 번영하는 것을 보며 러시아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이용할 방법을 구상했습니다.

하지만 표트르는 계획의 구체적인 실현을 원했고 유럽 열강의 대열에 끼어들기 위해선 중세의 비합리적인 후진성을 탈피해 서구세계를 휩쓸고 있는 새로운 상업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러시아로 돌아온 표트르는 유럽 제국들과의 무역 활성화는 물론 군사적인 경쟁을 위해서 대대적인 해군력 강화 계획을 단행합니다.

표트르는 모스크바로부터 북쪽으로 640km 떨어진 발트해 근처의 네바강 지역을 주목합니다.

 



위의 그림이 네바강 위치입니다. 빨간색이 러시아 영토인데 네바강은 빨간색이 아닙니다. 그는 그곳에 도시를 세워 러시아가 유럽 열강의 대열에 오르는 발판으로 이용하고자 결심합니다. 그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입니다.

도시는 바다를 통해 바로 유럽으로 갈 수 있는 위치입니다. 하지만 당시 네바강의 주인은 스웨덴이었습니다. 1700년 표트르는 대대적인 군사적 공격을 강행해 네바강 지역을 점령합니다.   

1703년 드디어 새로운 도시 건설이 시작됩니다. 표트르가 구상한 새 수도는 요새의 형태였습니다. 육군과 해군의 중심지이며 서부 유럽의 현대적인 사상이 러시아로 유입되는 통로였습니다.

유혈 학살과 전쟁의 힘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건설됩니다.

새 수도가 발트해에 가깝다는 장점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1년에 5개월 동안이나 하구의 삼각주와 주변의 늪지가 얼어붙었고 날씨가 따듯해지면 그 얼음이 녹으며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곳에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대단한 도전이었습니다. 표트르는 러시아의 강점인 순수한 노동력만으로 돌파구를 만들어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노동자들의 맨손으로 지어진 도시입니다. 주변이 온통 늪지로 뒤덮여 있어 활용 가능한 자재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구의 물 위에 지어질 요새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은 맨손으로 수천kg의 흙을 퍼내어 외투와 윗도리에 담아 날라야 했습니다. 모든 자재는 외부에서 들여왔습니다. 도시의 토대를 마련할 엄청난 양의 목재는 상류에서 잘라내 물에 띄워 내려보냈습니다.

단단한 바닥이 없었기 때문에 말뚝을 박아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나무를 박는 데는 위의 기계를 이용했는데요. 도르래로 빨간색 부분을 들어 올린 후 강하게 낙하시켜 나무를 박았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는 수천 명의 노동자가 투입되었는데 그만큼 질병과 홍수, 피로 누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1708년까지 약 25,000여 명의 노동자가 도시를 건설하다 목숨을 잃어 해골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도시가 완성될 당시 정확한 통계가 없어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희생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19세기의 한 역사학자는 지금껏 일어난 세계의 모든 단일 전투의 전사자 수보다 많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표트르에게 백성의 희생은 목적 달성을 위한 통과의례에 불과했습니다. 17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 조선소에서 첫 번째 전함이 축조됩니다. 그곳은 도시의 첫 번째 산업단지였습니다. 단지 내에는 조선 기술자와 돛과 밧줄 제작자들의 숙소와 대장간, 대포 주조소 등이 들어섰습니다.

해군을 강화한 표트르 대제는 독단적으로 제국의 전면적인 변화를 주도하였습니다. 1712년 표트르 대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 수도로 정합니다. 300년간 러시아를 이끌어온 모스크바 시대는 한순간에 끝났습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많은 러시아인은 표트르를 마치 외계인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표트르의 급진적인 사고와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표트르는 전임 황제들에게서 이어받은 전제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러시아를 개혁하겠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어떤 상황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표트르는 새 수도를 건설하는데 비용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유럽의 중심으로 진출하기까지는 할 일이 많았지만 1714년경 오랫동안의 과중한 업무로 표트르의 건강은 악화하였습니다. 표트르의 강력한 의지로 진행되던 변혁을 위한 모든 노력은 점차 빛을 잃어갔고 러시아는 다시 한번 혼란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표트르 대제는 수십 년 동안 러시아를 대제국으로 변모시키고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는 두 가지 업적을 이루어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에도 그는 친구들과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셨고, 그런데도 언제나 활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표트르는 북방전쟁에서 스웨덴을 격파하고 러시아의 영토를 발트해와 태평양 연안까지 확장했습니다. 또한 유럽 스타일의 새 수도와 해군을 창설하고 기술 및 과학학교를 짓고 러시아의 무역량을 7배 증가시켰습니다.

군사적 정치적으로는 러시아는 이미 제국이 되었지만, 대제국이 되기 위한 러시아가 부족했던 1가지 요소인 위엄도 만들었습니다.   

1714년 표트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40km 떨어진 곳에 바다를 내려다보는 15m 절벽 위에 거대한 궁전 건설을 계획합니다. 궁전 이름은 페테르 호프입니다. 2.4km가 넘는 부지에 거대한 정원과 황금으로 도금한 분수들이 둘러싸여 있는 화려한 궁전입니다.

 



위의 사진이 페테르 호프 모습입니다. 거대한 궁전의 건설은 1716년 시작되었습니다. 수많은 군사가 궁전 건설에 투입됐습니다. 그들은 분수에 물을 대기 위한 수로관을 건설했습니다. 1719년 러시아 최초의 수력 공학자들은 대규모 수도관 건설에 착공합니다.   

1725년 표트르 대제는 물에 빠진 사공을 구하기 위해 얼음물에 들어갔다가 병을 얻어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표트르 대제는 고립되고 후진적인 러시아를 개혁해 현대식 제국으로 변모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상 표트르 대제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저러면 왕이라도 암살하려고 대들던데 러시아는 어떻게 잘 해냈나 봅니다.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데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단점이긴 하지만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같은 황제를 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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