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설립 에 대해 알아봅시다



카이스트 설립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카이스트 대학교는 우리나라 최고의 공대, 자연대를 보유한 학교입니다. 공학은 사람을 도와주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라 하는데요. 뼛속까지 공학자를 길러내는 카이스트의 처음은 어땠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위의 장소가 카이스트 비전관입니다.

실용적인 카이스트의 첨단 기술과 공학 철학은 설립 초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산업화가 시작된 1970년 한국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과학기술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이공계 대학원을 만들고자 준비합니다.

 


 

당시 카이스트 설립에 기초가 된 것이 터만(Dr. Terman) 보고서입니다. 프레드릭 터만이라는 분이 계신데요.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 불리고, 위대한 전자공학자입니다.

 



위의 분이 프레드릭 터만입니다.

프레드릭 터만은 스탠포드 공대 학장을 하셨습니다. 당시 정근모 박사님이 미국의 NSF(미국국립과학재단) 에서 일을 하실 때입니다. 정근모 박사님이 이제 거기 조사단에 한국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프레드릭 터만 보고서를 쓰셨는데 거기서 제안한 것이 “‘KAIS(카이스)’를 만들어라. 한국과학원을 만들어라. 그리고 과학원의 졸업생들은 기업체에서 필요로 하는 그런 사람을 배출해라.”입니다.

 



위의 사진은 KAIS 한국과학원 간판을 다는 모습입니다.

이 보고서에 따라 1971년 카이스트 설립을 합니다. 처음에 대학원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생들만 모집했습니다.

 


 

당시 카이스 입학 설명회에서는 획기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외국에서 교육받은 분들이 새로운 커리큘럼으로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학부 졸업생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공부하는 측면에서 상당히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숙사를 제공하고, 학비도 면제해 주고, 남자들은 병역 문제까지 해결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보충역 훈련을 받으면 병역이 면제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많은 학생이 외국으로 유학하려고 생각하던 학생들도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KAIS 기계과 첫 박사 취득자는 2명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기초과학 분야를 제대로 투자하기 시작한 게 1970년대 카이스트 설립 시기라고 보면 됩니다. 그것이 학문의 1세대이고, 학문의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면 학문의 3세대의 시작이 2030년 정도인데요. 그때쯤이면 노벨상이나 필드 메달도 따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 후반 카이스트는 외국에 있던 인재들을 국내로 초빙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때 과학기술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인 전길남 박사님이 등장하십니다.

 



위의 분이 전길남 박사님입니다. 저분이 1985년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인터넷을 연결하셨습니다.

 

이상 카이스트 설립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과학 혹은 공학은 사람을 더 편리하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중요하고, 인류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수단입니다. 공학을 잘 발달시켜 인류가 더 나은 종족이 되면 좋겠습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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