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루스 대왕 에 대해 알아봅시다



키루스 대왕 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키루스 대왕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훌륭한 정치가였습니다. 포용과 자비로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역사가들은 그를 휴머니스트로, 유대인들은 그를 신이 내린 왕으로 칭송합니다. 백성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고, 그에게 정복당한 이오니아인들조차도 그를 공명정대한 통치자라고 불렀습니다.

 



위의 그림이 키루스 대왕 모습입니다.

키루스 대왕 은(기원전 580~530)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었습니다. 페르시아는 현재의 이란입니다.

 


 

기원전 559년 키루스 대왕이 권좌에 오릅니다. 이로써 아케메네스 왕조가 창건되었습니다. 이들은 장차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건축술의 가능성을 재정립합니다.

키루스 대왕은 대왕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왕입니다. 키루스 대왕은 고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였습니다. 아마 그 기록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원전 554년 키루스는 정적들을 물리치고 페르시아의 유일한 강자로 올라섭니다. 이젠 세상을 정복할 차례입니다. 그에 맞게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 웅장한 수도를 건설해야 했습니다.

기원전 550년 키루스는 고대 역사상 유례없는 거대 건설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현재 이란의 남서부에 있는 페르시아의 첫 번째 수도 파사르가다에가 그것입니다.

키루스는 혁신적인 건설가에 가치 기준도 매우 높았습니다. 수많은 정복 사업을 통해 축적한 키루스의 기술이 건설계획을 시행하는 데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도 로마처럼 외부의 기술을 차용했습니다. 그들은 정복지로부터 발전한 문화와 사상을 차용한 후 그것을 그들만의 독창적인 기술로 변화시켰습니다.

파사르가다에는 수천km 떨어진 아시리아와 이집트 소아시아에서 들여온 기술로 만들어졌습니다. 수많은 석공과 목공, 벽돌공, 조각가 등의 기술자들은 대부분 제국 밖에서 영입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파사르가다에의 걸작으로는 거대한 공원과 아름다운 정원으로 둘러싸인 두 곳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담으로 둘러싸인 페르시아의 아름다운 정원인 파라다이시아가 유명합니다.   

 



위의 그림은 정원 파라다이시아의 상상도입니다.

1,000m 가량의 다듬어진 석회암으로 둘러싸인 정원은 약 15m 간격으로 물을 보관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파사르가다에의 정원은 향후 2,000년간 세계 유명한 정원을 꾸미는데, 기본 자료로 이용됩니다.

 

 

파라다이시아의 특징은 기하학적인 도형을 적용한 점입니다.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의 정원에 사이프러스 나무와 야생 식물, 장미, 백합 등의 꽃과 각종 식물이 조화를 이뤄 오늘날까지 정원 구성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빨간색 지역이 키루스 대왕 시절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입니다.

파사르가다에가 건설되는 동안 키루스 대왕은 차례차례 이웃 왕국을 정벌해 갔습니다.

키루스 대왕의 다른 점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서 피정복민들을 노예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키루스 대왕은 종교와 사상의 다양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539년 키루스는 바빌론을 정복하지만, 그는 자신을 정복자가 아닌, 독재자에 핍박받던 백성들을 구해낸 해방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을 해방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빌론에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이었는데요. 키루스는 유대인들을 해방하면서 페르시아와 호전적인 이집트의 완충지역을 두려는 계획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키루스는 이방인으로 유일하게 구원자, 혹은 메시아로서의 호칭을 얻습니다.

하지만 키루스 대왕은 기원전 530년 전투에서 사망합니다. 그는 미처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떤 면에선 줄리어스 시저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이상 키루스 대왕에 대해 알아보는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성군인거 같은데 일찍 돌아가셔서 아깝습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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